기도? 필요해?
아, 빌어먹을!
기어이 인간 아닌 것을 곁에 잡아 둔 인간들아.
빌어먹게 사랑스러운 인간들아.
어쩌겠어, 사랑해야지.
이것은 여전히 당신들을 사랑한다.
샨프시 멜린의 첫인상은 보통 눈, 하늘에서 포슬포슬 떨어지는 눈이었으나 이제 눈길은 녹아, 짧게 사라졌다. 못해도 5년 간 바뀌지 않은 머리카락, 새로 생긴 빗으로 곱게 빗던 그것은 이제 더이상 단정하지 못하다. 목덜미에서 잘린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곱슬거린다. 눈이 그쳤다.
아직까지 짧게 꼬불거리는 앞머리까진 눈이 내리는데, 그 아래 그러난 동그란 이마와 목덜미에는 눈이 녹기 시작하여, 젖은 흙색이 보인다. 눈이 녹은 산길이 이런 색일까. 눈썹이나 속눈썹 따위가 새하얗기에 아직 드문드문 덜 녹은 눈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거기서 좀 더 아래, 마주한 시선에서 새싹이 피던 눈동자가 죽었다. 탁하게 침잠한 연둣빛 눈동자엔 더이상 빛이 없다. 더는 웃지 않는다. 하여 이것이 마냥 순한 눈꼬리를 지니지 않음을 알게된다. 그렇게 험악한 인상도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고양이에 가까운, 무기력하고 예민한 눈매에 포인트처럼 치켜올라간 눈꼬리. 이젠 이것이 마냥 동그란 인상이 아님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단정하던 단복이 조금 흐트러졌다. 다른 것은 단정하나, 목덜미의 리본이 종종 풀려있는 모습이 보인다. 단추도 두어개 풀려있다. 아무래도 챙길 여력이 없는 모양이지. 손을 보호하던 장갑이 사라졌다. 더는 기도할 것도 없다는 듯, 손을 잘 모으지 않게 되었다. 무언가 더하거나 수선하지 않고 가능한 있는 그대로 입는 것이 특징. 굳이 다르다고 한다면 오히려 빼낸 것이 조금 다른 점일까. 어깨나 허리 등에 차는 갑주와 장식으로 들어간 천 따위는 진즉 제거해버렸는데, 이는 샨프시가 멜린이라는 것에서 기인한다. 의료 활동에 갑주며 흩날리는 천 따위는 행동의 제한일 뿐이라며, 전투시에만 겨우 다리 갑주를 착용하는 것이 전부이다.
단복을 입었기에 크게 두드러지진 않지만, 한 눈에 여성의 체형을 가졌음은 파악할 수 있다. 갑주며 장식 따위를 하고 있더라면 잘 몰랐을 법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제하였기에 오히려 티가 나는 편. 그 외에 특별히 두드러지는 체구는 없지만, 상체보다 하체가 더 튼튼해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리라. 샨프시는 그만큼 많이 뛰어다니는 사람이고, 손을 쓰는 만큼 발놀림이 참으로 뛰어난 기사이므로.
+옷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가끔 움직임 너머로 목에서 체인이 반짝거리는 것이 보인다. 그 끝에는 제 반쪽의 유품이라는 녹빛 십자가형 펜던트가. 다만 악세서리가 불편하다는 말을 하는 이 답게, 목에 안 걸고 체인에 달아 주머니에 넣어둘때가 더 잦다.
(*전신: 크레페-삼늘님 커미션 @Smlee)
옛날에는
기도와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고요한 자. 앞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이며, 고요한 자는 비유에 가깝다. 실제로 말 수가 적거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성격도 아니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필요하다면 자잘한 수다도 떨고, 적절히 말과 침묵을 잘 섞어쓰며, 필요하다면 타인에게 참견도 서슴치 않는. 오히려 귀찮다면 귀찮은 자. 그럼에도 고요하다 평가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발소리가 없다. 숨소리가 없다. 목소리를 내기 전 발성에서 나오는 숨결 하나조차 인지하기가 쉽지 않다. 대체 언제 오신건가요? 이 말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꼬박꼬박 들을 정도다. 정작 본인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는데….
위 평가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평이 좋다. 참견쟁이라는 점은 온갖 곳에 소문이 파다할 정도라서 누군가에겐 단점으로 치부되기도 하나, 필요한 이들에겐 그보다 큰 장점이 없음도 사실이기에. 누군가가 손을 뻗으면 거부하는 법이 없다. 필요한 이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거부하는 이에게도 끝없이 다가간다.
샨프시 멜린은, 소리없이 다가오는 귀찮은 구원이다.
샨프시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샨프시를 멀리했다. 그러니까 친하다고 생각했더니 아니었고, 가깝다고 생각했더니 멀었다. 거울에 비춰진 자신과 샨프시의 거리가 보이는 것보다 멀었다. 멜린의 사람들은 말한다. 샨프시 저것이 멜린으로 살면서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친밀하게 구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사람을 돕는다. 돕고자 한다. 그 모든 행위에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타인이 제게 다가오는 것을 거부했다. 이해받길 원치 않았다. 샨프시가 누군가를 돕는다면, 그런 샨프시를 도울 이는 누구냐 물을 때 샨프시는 언제나 기도를 입에 올렸다. 그것은 선이었다. 보이지 않으나 아주 선명한, 샨프시가 그은 당신과의 거리.
멜린의 샨프시는, 얇고 깊은 선이다.
나약하고 나약하여, 그렇기에 더는 도망칠 수 없는 자. 도망친 끝에 낙원이 없다는 말은 어디서 처음 나왔는가? 그래, 정답이다. 낙원따위 없다. 애매하게 현명하여 도망쳤으나, 도망 이상의 것은 실현하지 못한 소녀는 자책의 끝에 낙원을 찾지 못한 채 정착했다. 도망친 끝에 남은 것은 자책어린 꿈. 소녀의 육체는 자랐으나, 그 정신은 여전히 소녀에 머문 채다. 기도는 스러진 소년을 위해, 괜찮다는 말은 내면의 소녀를 위해, 고요함은 죄인이기에 숨죽이는 것이며, 타인에게 손길을 내미는 것은 나 자신에게 내밀 수 없기 때문이니.
난 그저 나 자신을 위해 타인을 돕는다. 한 명이라도 더 도울 수 있다면, 구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언젠가 나를 뒤덮은 나의 죄를 조금이나마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나의 죗값이며, 도망친 끝에 깨달은 유일한 속죄. 그러니 나를 도우려 하지 마세요. 다가오지 마세요. 나를 알려하지 마세요.
샨프시는 그저, 작은 죄인인걸요.
먼 곳에서 보는 샨프시 멜린은,
웃기지 않으면, 즐겁지 않으면 웃지 않는다. 말 수가 줄었다. 타인에게 여전히 친절하나, 어딘가 묘하게 날카로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말투가 바뀌었기 때문인가? 피곤한 얼굴 때문인가? 물론 모두 맞는 말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 왕궁 내 사용인들은 말한다.
"샨프시 단장님,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확실히 달라졌지. 그래도, 도와달라면 잘 도와주잖아. 왜? 싫어?
가까운 곳에서 보는 샨프시 멜린은,
누군가는 말한다. 샨프시 멜린이 드디어 연기의 가면을 벗고, 모방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또 누군가는 말한다. 아이 같은 사람이라고. 어떤 이는 공범자, 공유자라고 부르며, 어떤 이는 얼굴만 마주치면 인사 대신 짜증을 나눈다. 본래의 샨프시 멜린은 답답한 것 없이 시원스럽다. 아이처럼 투정과 응석을 부리고, 누군가와 닮은 점을 공유하며, 싸워대기도 한다.
누군가의 주치의, 누군가의 단장, 누군가의 가주, 누군가의 지랄맞은 이해자, 누군가의 동생, 누군가의 귀찮은 자, 누군가의-...
"샨프시 멜린."
그게 이것의 이름.
스스로 바라보는 샨프시 멜린은,
이것은 여전히 인간이 아니다. 숨길 것 없이 말하고, 진실을 내뱉고, 거리를 지우고 다가가도 결국 인간이 아니다. 여전히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주 드물게 드는 이해하고픈 마음은 한정적이고, 하필 처음 이해해버린 자에겐 욕이나 실컷 퍼부으며, 따라서 사람에게 서툰 것이 분명히 보일 터다.
단장인 샨프시, 가주인 샨프시, 멜린인 샨프시, 누군가의 동생인 샨프시, 주치의인 샨프시, 아이같은 샨프시, 뇌와 심장, 중재자. 모든 샨프시는 그 내면에서 언제나 싸우고 합의하므로, 이것은 결국 그를 관찰하고 결과물을 출력하는 '개체'가 된다.
누군가의 성장을 지켜보고, 보내주고, 곁을 지키고, 그 편에 서며, 달래준다. 한 편 자신을 봐주길 원하고, 붙잡고, 싸우고, 애증하며, 투정부린다. 이것은 모순 덩어리의 '개체'로서 작용한다.
"근데 뭐, 이게 원래 나인데 어쩌겠어."
그러길래, 왜 나에게 사랑스러웠어. 이 오합지졸들아.
-기존에 가지고 있던 '녹빛 십자가형 펜던트' 하나.
-멜린의 가주에게 받은 '티투칸의 증표' 하나.
무기 : 멜린의 인간은 무기가 주어지지 않아도 싸울 수 있다. 샨프시의 발놀림은 그저 잘 뛰어다녀 생긴 것이 아니다.
-멜린이 가문의 피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샨프시 멜린 역시 멜린의 피를 타고 태어난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샨프시는 멜린이고, 그 능력을 인정받은 밤빛 기사단의 일원이므로 그 출신은 문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샨프시의 출신지는 멜린에서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고, 누군가 외형에서 추측을 해볼 뿐 정확한 출신지를 아는 이는 없었다. 스스로도 굳이 말하지 않았고, 누가 물어도 적당히 흘러넘겼기에 결국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다만 스스로 밝힌 고향에 대해 좋은 감정이 없음은 분명해보인다. 사이탄, 메마른 사막의 나라. 이것의 눈에는 수없이 쌓인 모래며 오아시스가 전부 지옥으로 보이는 모양이지.
-멜린이 뛰어난 의사인 동시에 육탄전에 능한 기사가 많음에 따라, 자연히 샨프시 역시 그러리라 추측한다. 실제로도 샨프시는 육탄전에 강했다. 무기를 사용하기보다, 맨몸으로 대적하는 것이 가장 편한 타입의 투사였다. 다만 손은 치료에 사용해야 한다며 최대한 보호했으며, 이는 샨프시가 발놀림을 수련하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팔 힘이나 악력 따위는 평범한 수준이나, 그의 달리기나 발차기를 보는 순간 샨프시가 멜린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조금씩 다를 수도 있는 샨프시의 평가에서 모든 이가 똑같이 평가하는 것이 바로 고요함인데, 성격이 조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몸에서 나는 소리가 거의 없다시피 한다. 발소리부터 숨소리 하나까지, 일부러 들으려 집중하거나 샨프시가 소리를 내어주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하는 이가 부지기수다. 기척을 느끼는 뛰어난 기사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정도로 뛰어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니. 스스로 말하길, 결코 일부러는 아니라고 한다. 어느 순간부터 몸에 벤 버릇이라나.
-종종 머리를 짧게 자를까 고민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결국 항상 묶을 수 있는 현재의 길이를 유지하고 만다. 심하게 곱슬거리는 탓에 오히려 짧게 자르면 손이 더 많이 가기 때문이다. 적당히 기른 상태에서 필요할 때에 머리를 질끈 올려묶으면 일 할 때 거슬리지 않는 사실을 알고 타협한 상태로, 이 스타일은 못해도 5년 간 바뀐 적이 없다.
-결국 머리를 잘랐다. 예상대로 정돈되지 않은 채로 북슬북슬 지저분하다. 손으로 대충 빗느냐 더 지저분하고, 결도 나쁘지만 본인은 신경쓰지 않는 듯.
-샨프시를 참견쟁이라 부르는 이는 지천에 널려있다. 실제로도 샨프시는 스스로를 참견쟁이라 칭하며, 고민에 빠진 이나 곤란한 이를 발견하면 지나치는 법이 없다. 누군가 귀찮아해도 도우려하고, 도우며, 기도해주고, 들어준다. 누군가는 샨프시를 호구라했고, 누군가는 샨프시에게 천사라 말했으며, 마침내 모든 이들이 결국 샨프시를 참견쟁이로 인정했다.
-이제 더는 참견쟁이로 살지 않을테다. 그러나 멀리서 지켜보다가도, 필요해보이면 성큼 다가와 도와주고 가버린다. 어디 제 버릇 남주기가 쉽던가. 이것은 여전히 밤빛을 사랑하므로.
-버릇적으로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린다. 식전 기도 따위는 하지 않는 주제에, 일을 하기 전이나 누군가의 고민 또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동안은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듯 눈을 감는다. 대부분은 신앙심이 깊은가 생각하고 가벼이 넘기지만, 어떤 이들은 이 오묘한 기도에 샨프시의 신앙심을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튼 그도 밤빛 기사단이므로, 이 의심은 아주 짧은 파문으로만 끝난다.
-손을 보호치 않는다. 기도치 않는다. 다만 가끔 혼잣말을 중얼거릴 뿐이다.
+책을 자주 읽는다. 특히 옛날 이야기, 고서, 금서, 동화, 지역설화, 구전설화 등의 역사가 담긴 것들을 선호한다. 그것은 이것이 처음 배운 지식들이 나라의 역사임에서 기원한다. 그걸 가르쳐준 이가 누군지는, 밤빛에선 이제 모르는 이가 없을 터다.
-995년, 히페리온의 승리로 전쟁 종료 직후, 기사단의 인원 재정비 과정에서 사망한 단장 이후의 다음 단장으로 승격했다. 어린 나이에 승격되었단 점에서 반발이 일 법도 했으나, 당시 적은 단장직 후보 단원 중 누구보다 친화력이 뛰어나 사람들을 잘 보고 있었다는 점, 전투 측면에서 부족한 미달 사항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 그보다 더 뛰어난 의료 공적으로 가장 많은 이들을 살려낸 멜린이자 의사로 손꼽힌 점, 전략 수립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고 자신의 입장에 대한 처세술이 능숙한 점 등. 무엇보다 대부분이 망설이거나 거절할 때에, 한 번의 고민 없이 '맡겨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했던 점 등이 이례적인 임명 사유로 꼽히고 있다.
페도나 린 : 정말로 괜찮아 질 것 같아.
밤빛기사단장, 샨프시. 밤빛처럼, 눈처럼 조용히 다가갔다. 기사단 내에서 검으로 살아가는 페도나를 소리 없이 돌보아 준 건 언제나 샨프시였다. 기사단장이므로 돌보는 게 아니라, 정말 당연히 내려앉는 눈처럼.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끝내면 녹아 사라지는 눈처럼. 샨프시는 선을 유지했다. 그것이 오히려 페도나에게 평온을 주었을 지 모른다.
레오카디아 : 위태로운 구석.
레오카디아가 히페리온이기에 챙기는 건 아니었다. 샨프시는 레오카디아의 웃음 아래의 무언가를 느꼈다. 어린 기사의 철 없는 웃음이 아니었다. 좀더 지켜보기로 했다.
헤카테 : 부상.
타라스토의 기대주, 헤카테. 샨프시가 불려갈 때 자세한 이야기나 설명은 없었다. 타라스토 가문에서 손꼽히는 의사를 급하게 찾아 호출된 것 뿐이었다. 그곳에서 마주한 건 오른쪽 어깨와 손목에 부상을 입은 헤카테였다. 샨프시에 의해 문제없이 치료받았지만... . 타라스토 가문에서는 헤카테가 검을 들지 못한다며 샨프시에게 상담했다. 심리적인 문제일까? 계속 타 가문에 드나들기에는 곤란해 다른 의사에게 맡겼다. 이후, 헤카테를 기사단에서 재회했고 그 쯤 타라스토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헤카테가 검을 다시 들 때까지, 정기검진을 부탁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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