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대로 해.
변절자, 배신자. 망설인 탓에 평생의 목표를 이루지 못했으니 무엇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나의 마음은 중요치 않아. 그저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길.
유난히 작은 발걸음 소리, 소리 없이 다가와 소리 없이 떠나는 인간. 빛을 떠나 어둠으로, 그리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따라 마구잡이로 층을 낸 붉은 머리가 목과 허리께에서 흩날린다. 끝이 살짝 올라간 눈썹, 선명한 하늘색 눈, 날카로운 검은 동공은 상대를 바로 쳐다볼 줄 알게 되었다. 피곤한 낯짝 위로 입가의 점과 오른쪽 눈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눈에 띈다. 덥수룩한 머리가 거둬지면 왼쪽 귀에 검은색 링 귀걸이를 했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 남들과 똑같은 제복을 갖춰 입었으나 겉옷에 후드를 추가한 점은 다르다.
양 손바닥과 목젖 아래에 새겨진 흉터, 세로로 찢겨진 흔적이 남은 등, 곳곳에 남은 화상이나 절상 흉터 따위를 몸을 단단히 싸맨 제복 아래로 숨겼다.
금속이 부딪쳐 절그럭대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녹슨 철의 냄새가 난다.
두상 @Heart_S2_CM
루카스 나다니엘 멜린, 또는 루카스 나다니엘 헤이즈. 플로아, 뮤르 출신. 불타버린 부지 아래에 재단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유이한 생존자 중 하나임은 틀림 없다.
무엇도 잊어버린 적 없으나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는 면이 존재한다. 비밀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누가 요청하든 자연스레 밝혀지기 전까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자신은 축소하고 상대는 확대하니 적당히 이야기를 털어놓기에 좋은 상대. 얌전한 편이며, 자기 주장이 없고, 크게 가리는 것이 없는 적당한 인간. 걸려오는 싸움과 적의를 쉽게 흘리진 않지만, 그조차도 적당히 상대하는 편.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것은 아니지만, 마냥 좌절하지도 않는다.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기 때문에.
그러니 당신은 당신 원하는 길을 걷기를,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할 테니.
벽을 긁듯이 희미하고 거친 목소리. 버릇없는 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나 목이 아픈 것은 여전해 따뜻한 차를 마시는 습관이 들었다. 웃거나 우는 낯 쉽게 보이지 않지만 곤란하거나 불안할 때엔 양손을 쥐었다 펴거나 목 아래를 매만지는 습관이 있다. 외출을 즐기지 않고, 밖에 다닐 땐 후드를 눌러 쓰고 다닌다.
늘 지니고 다니는 검 두 자루—바스타드 소드 한 자루와 시미터 한 자루—는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게 됐다. 그저 새로 배급 받은 검 두 자루를차고 다닐 뿐. 나의 물건은 없어졌지만, 자신은 여전히 이곳에 존재한다.
여전히 불을 두려워하거나 오래된 악몽을 꾸지만⋯
먼 훗날엔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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